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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염치(廉恥)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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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염치(廉恥)라 한다. 잘 못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를 일컬어 “염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를 파렴치라 하고, 순우리말 얌체는 여기서 유래했다. 

성역으로 여겨졌던 사법부의 민낯이 하나 둘 드러난 지 6개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로 시작된 사업부 농단사건은 ‘청와대와 대법원 간 재판거래 의혹’으로 확산했고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 지 108일만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수석재판연구관 등이 줄줄이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헌법이 허용한 권한을 권력화해 쌓은 철옹성에 금이 갔다. 오랜 관행이었을 법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높은 옹벽 속에 존재했던 권력기관의 부적절한 과거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그러면서도 문건과 진술로 확인되는 행적에 그와 법원의 염치를 기대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부끄러운 과오를 전문 직업인들로서 스스로 씻어내기를 바랐다. 

기대가 컸던 것일까. 양 전 대법원장의 시간은 여전히 법원행정처 차장이 만든 문건에 대해 “내용을 알지 못한다”던 지난 6월 ‘놀이터 인터뷰’에 멈춰있고, 법원은 유래 없는 빈도로 양 전 대법원장을 포함해 당시 주요 요직에 있던 인사들의 각종 영장청구를 잇달아 기각했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오랜 기득권과 조직의 논리에 뒷전으로 밀렸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상대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했다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통일성에 무게 중심을 뒀다.” 오랜 법조 경험을 가진 한 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을 이렇게 평했다. 그가 추구했던 통일성은 사법부를 경직된 관료 집단으로 만들었다. 견제 장치 없는 막강한 인사권을 무기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했고, 이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헌법이 명시한 ‘독립성’을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3대 0’.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116건 중 39건의 결과는 이랬다. 약 34%다. 대법관의 수를 13명으로 정한 경험적 취지가 있을 터인데 자주 일치된 판단을 내렸다. 그 39건 중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선개입 사건, 키코(KIKO) 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소멸시효 축소 등이 포함돼 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다시 떠오른다. 지금으로서는 검찰개혁만큼 사법개혁도 급하지만 더딜 것 같다. 부디 염치 있는 내부의 소수의견이 다양한 목소리로 이어져 속도를 더하길. 그래서 상식을 갖춘 사법부가 공동체 안에 다시 꽃 피우길 기대한다.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